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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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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 위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에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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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가 익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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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들은 정오에 익는다
나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물 스미듯 색을 입는다
처음엔 올망졸망한 초록 덩이를 매달아
기온을 쫓아 부푸는 체온을 재며
비좁은 틈새에서 나오는 색의 눈금을 확인하는
햇빛은 온전한 색을 얻기까지
모성 가득한 작열이다
곱살스레 번진 색의 성정을
넌지시 담아보는 손끝으로 순을 짚듯이
거두는 밑동이 푸른 꼭지에 떠받쳐
편편하게 올려진다
탯줄을 끊고 나온 자리에
뜨거운 수액이 표면장력에 드는데
둥근 마디에 칼집을 내어
수혈하듯 붉은 열매를 비워내는 한낮이다

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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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씩 물을 줘야 하는 식물이야
네 성정에 귀찮은 일은 안 하겠다고 하니 한 달 동안이나 혼자도 잘 자란다는 식물을 샀어 다육이라고 한다지 그래 이름은 뭘로 붙여줄 거니 식물이니 그 친구인 과일의 이름을 붙여줄 거니 얘는 움직일 수 없으니 귀찮을 수도 없어 빛 쪽으로 얼굴을 마주닿게 해 주고 말만큼이나 소란한 바람을 쐬어주기를

애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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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다
이제 들어가자
네 앞에서 발길을 돌리며
밤이 깊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는 반복하고 끝내지 못하고
서랍장을 모두 열었다
숲에서 숲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
밤에는 시소를 타야지
솟아오르는 일과
가라앉는 일의 깊이를 알게 될 때
빛은 제 몸을 비틀어
직선의 몸을 가지게 되었다
직선으로 깨지게 되었다
파편으로
빛을 경험하는 일처럼
도달한다는 것이
산산 조각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뛰어간다
나는 넘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복을 빌어주는 일을 배워서
너의 시간을 축복해야지
네가 어딘가에 도달할 때까지
너의 흰 재의 시간
마른 장미의 시간을

사랑을 둘러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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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잎 클로버
이빨을 몽땅 빼뜨린, 내 늙은 사랑은 또 싸움꾼으로 돌변해 어딜 가

너무도 외롭기 때문에 불과 어제 일을 잊고
열렬히 사랑해야 한다는 듯이
(실은 한 차례 거름 없이 초침에 찔린 세월도)
날 좇아 쓰라린 내상에 더디 피 흘리고 있었음이여.
걸음은 신발을 끌고 나가 홀연히 그와의 지난 꽃길에 내닫고
생각은 그가 따서 차려준다던, 흰 꽃밥에서 지칫지칫 발 디뎌 밟다
찾아낸 네잎 클로버 두 개와 오잎 클로버 한 개
두 개의 행운과 낭패스런 불행 하나였네
세월 가도 꽃말은 게 서서 한 발자국 도망 못 하였음을.
셈법으로 곱게 엄지 검지 두어 번 휘어감아 줄기 꿰어 돌렸던가
세 잎인데 이파리 돋을 때 상처가 껴 한 두어 장 더 난
다고
몰라 뭐 행운이야 꽃 같은 거 그런 거, 툭 내쏘는 한마
디로
실로 저물어가던 나는 어느덧 덧난 잎
내게 들여놓았네
찌르르 심장 뛸 때, 안 들키려던 낌새 같은 거 그런 거
반복된 손가락짓이 채근인 듯 그가 성가셔했고
우리 사이 낀 떨칠 수 없는 감정이
말라버린 흙덩이로 떨어졌네
행복에서 나아가던 행운이여 너는 이내 저만치 돌아서던
오오, 행운에서 더한 상황으로 나아갔던, 딱한 불행이여
나는 이파리를 하나 떼어내어, 이젠 행운 세 개 ······ 그러니, 내 몸 부위마다 연한 꽃으로 펴날래
나는 이파리 두 개 떼어내어, 욕심 하나뿐야 ······ 참도 행복해 그러니, 몰래 돌아올래
나는 이파리를 모두 건너뛰어, 나뿐이야 ······ 그러니, 제발 그냥 돌아와

흙덩이 묻은 발 보이잖는 농이 들었나 쬐그만 티눈 덧
났나
아, 나는 여태 못 떠나고
째서 빼낼 수 없던 상처로 클로버가 되어가면서
별달리 살아내는 돌연변이여서 거듭 덧나는 게 아니잖아
필요한 건 크낙한 행운이 아닌 거, 쬐그만 꽃 같은 거 그런 거
내게 필요한 건 많은 게 아니잖아
생살을 부위부위 저며 성한 몸 뜯던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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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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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와 걸었다
마을에 어울리는 작은 하천
물이 불어 유속이 빨라진 물가
방과 후에는
노란 귤을 빠뜨린 듯
금빛 석양이 따라다녔다
나는
그애의 이마
그애의 콧날
그애의 안경
그애의 한쪽 뺨을
조금씩 나누어 보았다
햇빛이 삼킨 얼굴
아주 나중에
상상은 해보았다
입안에 물고 있던 사탕 때문에 한번씩 대화가 멈추고
사탕을 녹이듯 어떤 말은 오래 생각했다
저기 좀 봐.
그애가 말할 때
나는 그애를 살짝 보고
깨진 사탕 때문에
혀끝에선 녹이 슨 책상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뭘까, 귤빛 석양을 따라 걸으며
그 여름
찬물에 자주 체하고
달려가는 낮잠
폭우처럼 한꺼번에 끝나는 시간표
끝날 듯 다시 이어지던 불꽃놀이
종례는 빼먹었다
*여름

굿을 외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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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은 꽃이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세상 주유하는 모습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어린 물고기들이
꽃잎 하나 물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는 모습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
유모차 안에 잠든 아기
담요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딸기들 곁으로
소월과 지용과 동주와 백석이 찾아와
서로 다른 자장가를 부르려 다투다
아기의 잠을 깨우는 것은 좋은 일
눈 뜬 아기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손가락 열 개를 펼치는 것은 좋은 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에
하늘의 마을이 있어
꽃잎들이 집들의 푸른 창과
지붕에 수북수북 쌓이고
오래전
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들
꿈인 듯 다시 쫓는 것은 더 좋은 일
*좋은 일

라스트 데이 오브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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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을 따라 앉은
네가 있던 곳에서 내가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기어코 살아나고
살아 있어서 우스꽝스러워
누군가 노을을 유화로 그리고 있거든
짓물러진 사과를 주렴
우리는 때때로
불확실한 날씨를 질투하기도 하니까
부엌에 서서
누군가의 저주를 들을 때마다 유리컵에 찬물을 넘치도록 따라 붓는다
타인에 대한 다정하고 적나라한 버릇
아홉 시에 옆집 아이가 공을 들고 너의 선잠을 깨우고 있었어 준, 너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지 그때 나는 가시가 없어서 위험한 건 장미가 아니라 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고 세 시에 너와 나는 같은 구두를 신고 강가를 갔지 말해 주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냥 표정만 건네 준 것 같았고 비가 오던 여섯 시에 우리는 차를 타고 돌아가다 미끄러져 절벽으로 떨어졌어 순간 네게 들이닥치던 불빛이
선명해,
유일하게 선명했다 그리고
네가 죽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아홉 시에 옆집 아이가 공을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손을 치켜들고 공을 뺏었는데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
이미 되돌리길 포기했다는 의미
공은 모난 구석이 없어서
신뢰를 얻는 법이 쉬우니까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배신이 가능하고
부디 한 번에 한 가지만 망했으면 좋겠는데
뒤집어지고
뒤집혀지고
너와 나의 역할을 바꿔 가면서
맹렬히 지켜보던 당신들은
내가 어느 결말에 도달해 간다고 생각할까
안녕, 당신도 나를 불쌍하게 여기니
*
두통도 없이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그 자리에 있었고
비극이 없는데
밥을 먹고 애를 써도 될까
이름이 외자라서 부족한 날들은
미신에 맡기기로 했다
아홉 시에 폭우가 쏟아졌다 주변이 계속해서 떨어져 나갔다 대문 앞에 옆집 아이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문을 열고 아이를 맞이해 주었다
연민도 없이
곳곳에 던져진
내 슬픔을 관람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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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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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섬을 가까이 두는 이유는 언젠가 그곳에 나의 이름을 불렀던 이의 온기를 섬기는 모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것들이 이렇게나 서둘러 휘발되는 줄 알았더라면 몰라보게 빨리 뛰어가볼 걸 그랬습니다 멀다면 먼대로 그보다 멀다면 더욱 더 먼대로

치명적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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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화백의 그림 '엔젤 솔저'를 본다
그림 속의 꽃들은 유난히 생기 있게 반짝인다
그 꽃들이 시들지 않는 이유는 치명적 그늘 때문이다
꽃 밑이거나 꽃 사이에 여백에
묵직한 무기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통꽃이거나 겹꽃이거나 자잘한 톱니모양 꽃이거나
혼자 피었거나
와글와글 무리지어 피었거나 이미 툭 꺾였거나
모든 꽃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총구가 있다
때로 외연이 내포를
꽃받침처럼 받쳐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꺾인 꽃과 내려앉은 꽃 사이, 시들거나 마르는 꽃 사이
발작적인 난분분과 붉은 웃음소리 사이의
음험한 그늘에
검은 무기가 숨겨져 있다
때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한 잎에 세 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점점이 박힌 반전이 있어 꽃빛은 요요하고 향내는 깊다
짐승처럼 뜨거운 숨소리를 내는 검은 입들
돌아서기엔 너무 늦어서 다행이다
삶이 일회적이어서 너무 섹시하다

명륜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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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를 쥐고 횡단보도에 서 있다
흔들리는 건반
알고 있어 너는 목소리에 대해 말하려 했지
목소리에 대해 말할 목소리가 없겠지
나는 접속사처럼 지워지는 물
깜박이는 신호등 아래
모자에 가려진 얼굴
구부러진 숲
바람을 밀어붙이는
너는 하품 그 밖에 물결이나 악보에 대해 말하고 싶겠지
묵상
레이스와 레이스
빳빳한 칼라와 움켜쥔 두 개의 구멍
단순한 형태 단순한 동작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겠지
뒤집히는 물
무릎을 맞대고 쉬운 말과 어려운 침묵을
두 눈으로
물고기 떼가 향할 때
손바닥의 말발굽이
차가운 뒷면을 읽어낼 때
너는 끝장내고 싶겠지
단추가 뜯어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녹색불이 깜박인다
관성이라는 말의 끔찍함에 대해
붉은 것 뾰족한 것
축축하고 차가운 오후
꺼낼 수도 집어넣을 수도 없는
눈빛으로
한 묶음
바닥을 흐르는 목소리
죄는 처음부터 있었지
그걸 취향이라고 했지

모텔 선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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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라고 불러주길 바랐다
그게 다정하게 느껴져서
침을 삼키고
우리가 진짜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은 오늘은 여기는
소주를 조금 나누어 마시고
우리는 서로에게 가능한 한 가장 심한 말을 해 주었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난 후에도 손가락은 다 잘 붙어 있다
너의 머리카락에서는 내 담배 냄새가 나고
나는 이것이 좀 좋은가 생각하다가
네가 날 어떻게 만졌는지 떠올린다
그건 너무 아무것도 아니어서
창밖에는 조금씩 비가 내린다
조금 더 추워져도 괜찮겠다
몸을 웅크리고
너는 다정하구나 말해본다
그런 건 모르겠어
네가 말을 한다
어쩌면 나는 네가 가장 쉽게 잊을 수 있는 이름
나는 살이 없는 것처럼 튀어나온 너의 뼈를 만진다

Language: English